의대 증원, 여가부 폐지와 과두정(2023.10.)
윤석열이 보궐선거에 참패하자마자 의대 증원 아젠다를 꺼내드는 것이 지난 대선 지지율 위기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슬로건을 걸 때와 겹쳐 보인다. 이 두 가지 대처로 미루어보아 나는 양당 집권층들이 국민 여론을 장악하는 수단을 항상 꿰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단지 그것을 사용할지 말지, 언제 꺼내들지를 결정할 뿐이다.
이는 매우 기이하면서 중요한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대선 때도 1월 7일에 윤석열이 이준석과 극적인 화합을 하기 직전까지 지지율을 처박으며 정권교체 실패의 곡소리가 전국에 울려펴졌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 권성동은 마치 여성가족부 폐지 7글자를 포스팅하기만 하면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뉘앙스가 보였다. 이번에도 의대 증원이 여론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반드시 불러올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과감하게 꺼내들었을 리가 없다.
요컨대 많은 사람들이 국민 다수결의 힘으로 참주 1명을 옹립하고 끌어내리는 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환상이 있으나, 실상은 강력한 입김을 가진 세력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과두정-즉 연립집권 체제에 가깝다. 내 주변에 이를 지적하는 지식인들이 늘 있어왔으나 오늘에야 이것이 새삼스레 눈여겨 보인다.
일전에 100분토론에서 유시민이 홍준표에게 "윤석열 대통령은 아는 게 없고 국정운영 혜안도 없어 보인다"라는 의미의 말을 하자, 홍준표가 "대통령은 아는 게 없을 수가 없는 위치이다. 모든 정보가 대통령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정보와 지식의 문제보다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라는 의미의 대꾸를 했다. 즉, 정권을 장악한 측은 각종 정책과 여론 동향에 대한 정보를 쉽게 받아볼 수 있는 동시에 그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게 정권 차원에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하면, 그 정권과 결탁한 과두 엘리트들이 앞장서서 강력한 스피커와 안테나 노릇을 하며 여론전을 펼친다. 누구나 알듯 조중동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보수정권은 조중동과 택시기사 등 일부 직역 단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인 동시에 그들의 원호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정권과 과두 엘리트의 연결이 느슨해지고 반목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노무현의 임기 말 레임덕과 파멸적인 정권교체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주도하여 일으킨 탄핵이다. 정당들이 중도층들만 바라보며 국정을 운영하고 선거를 치르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한 사람들이 많을텐데, 집토끼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케이스가 아닐까 한다. 노무현 역시 좌파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걸 깨닫고 우클릭을 하면서 집권 기반을 배신하는 개혁을 많이 했다.
중도층 여론이 언론과 각종 세력들의 프레임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갈대와 같기 때문에, 집토끼를 배반한 개혁가를 중도층들이 열렬히 지지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그림은 신기루에 가깝다.
현대 민주정의 진화 과정을 추측해보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자신이 힘있는 세력이라면 누구나 정권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싶어할 것이고,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라 한들 그런 과두 세력들에 손 한 번 내밀지 않고 정권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같은 대통령제-소선거구제 국가에서는 자연스레 두 진영으로 이합집산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내각제를 거부하고 대통령제를 지지하는 것도 최고 수권자만큼은 과두의 때가 덜 탄 신선한 인물로 세우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다. 앞서 말한 100분토론 홍준표가 "국민들이 정치 초보 대통령을 뽑았잖아요"라고 말하자 방청객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뼈가 있는 말이다. 국민들은 정치인이 도덕관념이 아니라 과두끼리의 물밑 타협으로 가타부타를 결정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온 세월이 길었다. 그러니 이명박, 문재인, 윤석열처럼 정치 경력이 매우 짧은 외부 인사를 모셔오는 경우들이 있었으며 노무현, 박근혜 역시 비록 정치인 출신이긴 하지만 본디 정계의 원로 이미지보다는 신선한 참주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니 정치적 기반이 약한 지도자가 집권한 후에 정치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결정을 택하니까 잡음이 자주 발생하는 것 아닐까. 윤석열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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